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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썸
하울의 움직이는 성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투진] ももいろのねこ(모모이로노네코)

 

 

 

 

하울 희진

소피 현진

센 희진

하쿠 현진

 

 

지브리 합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 *

 

 

아무 생각 없이 하교하고 길을 걷고 있었는데 난생 처음 보는 재앙이 눈 앞에 나타난 거야. 모자와 복면을 쓴 해괴망측하게 생긴 키다리들. 성별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알아보기 힘든 형체에 흉측한 웃음을 하고 있는 사람들 셋넷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섰어. 순간적으로 촉이 왔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본능적인 위기감. 거기서 파생되는 두려움. 그 사람들이 총도 칼도 뭣도 들고 있는 건 아녔지만 난 그 즉시 땅바닥에 발을 걷어차고 반대쪽으로 잽싸게 달린 것 같아. 씨발, 벌써 죽으면 어떡하지? 우리 집이 뭐 누구네랑 원수 진 거라도 있나? 싶어서 말이야. 돈 뜯어먹으러 온 놈이라도 될 까봐 그게 너무 무서워서 뛰었어. 일단 너무 공포감을 주는 복장이었고, 빚쟁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불량서클이라도 될까봐. 아니면 조직 폭력 집단이라든가. 그런데 나는 생각보다 달리기를 너무 못했고 발걸음은 워낙에 더디더라. 뒤에 쫓아오는 놈들은 내 두 세배로 빠르게 달리는 것 같았고 진짜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잡힐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 잡히면 어떡하지? 그냥 뒤지는 건가? 다음 날 지역신문 1면 헤드라인에, 아니, 미쳤어, 끔찍해. 아니 쟤네 인신매매단 아니야? 귀신인가? 머릿속에서 정리할 수 없는 잡생각이 제자리를 못 찾고 허공을 마구 휘저었던 것 같아. 이대로 머리 아파서 먼저 죽겠다 싶을 만큼?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본능은 겨우겨우 내가 골목을 지그재그로 꺾어서 돌게끔 하는 순발력을 마련해줬어. 이건 진짜 다행이었지, 그래도 목숨은 조금 벌었으니까.

 

근데 신은 내 편이 아니었나봐. 내가 결국 막 다른 길에 다다랐을 쯔음 넘어볼 수도 없는 벽을 발견했을 때 알았어. 오 마이 갓, 내 인생 18년만에 역사에 마감하는구나. 이제 진짜 저놈들한테 죽겠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차라리 스스로 죽어버리고 싶었어. 때마침 땅바닥에 벽돌무더기들이 놓여 있더라고. 두 손 각각에 그걸 집어들고 니 새끼들 머리통을 깨든지 아니면 내 머리통을 먼저 깨부수든지 생각하며 바르르 떨면서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아. 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떨리고 오금이 저리고.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 좋겠다, 눈물만 흐르고 있었는데.

 

운명이란 게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분명, 분명 이 골목의 끝에는 나 혼자였는데 말이야. 어느새 벽돌을 들고 있는 나의 오른 손을 잡은, 난생 처음 본 여자애를 봤을 때 말이야. 그 애는 뭔가, 뭔가 유난히 달랐어. 구세주라 느껴졌을 정도로. 그러니까 그 애는 나를 보고, 말도 안되게 예쁘게 웃으면서 말했어.

 

"죽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 찾았잖아."

 

그 애는 태연하리만큼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당장 저놈들이 골목의 끝에서 헥헥거리면서 따라오고 있는 순간에도 말이야. 미친 놈인가? 혹시 쟤도 같은 집단 사람인 건가? 아니 선하게 생기긴 했는데, 사람을 인상으로 판단하면 안되지만... 다짜고짜 찾았다고 하면서 내 생사를 걱정하고 있는 이 여자는 대체... 뭐냐고.

 

 

 

*

 

 

 

"자, 하던 대로 해보자. 하나, 둘 하면 뛰는 거야."

 

하나, 둘?

 

말도 안 돼, 무슨 이 벽을 넘자고? 어이가 없어서 그 애한테 물으니까 그 애는 그럼 그걸 못하냐는 둥 나에게 토끼눈을 뜨고 물었어. 네 키의 세 배가 넘어. 그렇게 말해줘도 그 애는, "그게 뭐가 문제야?"라고 도리어 나한테 다시 묻는 거야. 그러니까, 너무 황당했고 더 놀라운 건 그 애가,

 

"하나, 둘."

 

외치자마자 내 손을 들고 날았다는 거지. 말도 안 되게.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너희 이토록 판타지스러운 장면을 상상해본 적 있니? 내 두 발로 하늘을 걷는? 아니, 이건 24세기든 25세기든 말도 안 되는 일일걸? 그 애는 마치 자기가 민들레 씨라도 되는 마냥 가뿐히 하늘을 날았고 나는 그 애의 손에 붙들려 있었으니 같이 날았어. 진짜 신기하게 몸이 붕 뜨는 거야! 라이트형제도 제대로 못해본 일을 내가 한 거지. 몸이 핑글핑글 정말 날더라고? 아, 물론 손에 쥐고 있던 벽돌은 그대로 바닥에 낙하했어. 너무 놀라서 쥐고 있을 여유가 안 되더라고. 잠시 굉음이 나고 아까 그 놈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제서야 그제서야, 모든 걸 믿었었던 것 같다. 내 발 아래 세상이 있다는 걸.

 

처음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아니, 이게 행운이긴 하지? 발을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렸어. 물에 빠진 듯 아주 깊은 심연의 바다에 빠진 듯 발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고 간신히 움직였어. 마치, 물에 있는 느낌이더라. 새들이 이런 느낌이었나? 아니, 걔네는 멀쩡하게 내 옆에서 잘만 날던데. 차차, 새와 같은 눈높이에 있다가, 올라가서 평범한 건물보다도 더 높은 고도로 내려다보고, 그리고 이제 온 세상이 내 발밑에 있는 시야에 닿으니,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어. 이런 고도에서 멀쩡히 숨을 쉰다고? 말도 안돼. 나는 발을 어떻게 공중에 제대로 딛지도 못하면서 입만 살아서 그 애한테 따져 물었어.

 

"너, 너, 네가 무슨 신이라도 돼? 마법사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너 대체 뭔데? 너 어떻게 하늘을 날아? 그리고 야... 나 다리 빠질 것 같아, 어떻게 좀 잡아주든가."

"발을 내밀어서 계속 걸어. 계단이라도 되는 마냥 발을 위로 뻗으면 돼, 한 발, 한 발."

 

구름이 내 집 방바닥이라도 되는 마냥, 건물이 우리집 카페트라도 되는 마냥, 엉거주춤 한 발 한 발 내딛었어. 눈 앞에 펼쳐진 건 2018년 5월 일본의 봄 - 여름의 경계에 놓인 아이치 현이었고, 도시의 사람들이 저마다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라. 우리 동네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기도 하고. 솔직히 무서워하면서도 3분은 경치 감상했다, 뭐. 눈 앞에 어느새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도 보였고 우리 집도 보였다. 모자 가게를 하는.

 

"어, 우리 집!"

"저기가 너희 집이야?"

"그럼 당연히 너 모갸쿠(ぼうきゃく)고등학교에 다니겠네?"

"그치, 그런데 혹시 괜찮으면 나 우리 집에 데려다줄 수 있을까, 나 이제 좀 겁나서."

"미안해, 아스나(あすな), 이렇게 된 이상 집에 데려다주는 건 무리야."

"잠깐만, 너."

 

 

 

*

 

 

 

그 애한테 말해주지도 않은 이름을 그 애는 알고 있었어. 너 무슨 내 신변 조사라도 한 거야? 아닌데, 인신매매할 때 그런 걸 알고 하는 놈들이 있었나, 아니면, 아니면 청부살인?! 그 놈들 보다도 이 애가 알고보니 더 무서운 놈일 수도 있겠다 생각을 하니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어. 물론 그 놈들이랑 같이 있었어도 죽거나 어쨌거나 했겠지만, 말이야. 근데 내가 교복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런데 아스나(あすな)는 내 이름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아니야. 내 이름이 아니야. 분명 비슷하지만 내 이름이 아니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고 가슴이 답답하게 저려왔어. 심장이 일분에 150번씩은 더 뛰는 것 같이 쓰리게 뛰더라. 분명 똑똑히 기억했던 그러니까 당연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내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진짜 지금 이런 일을 겪으니까 뇌도 제대로 안 굴러가나? 일본식 이름, 그리고 한국에서 살았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이름.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속이 울렁거렸어. 토할 것만 같았고 혼란스러운 게 지금 내가 어떤 존재인지조차도. 머릿속에 몇 번 껌뻑껌뻑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고, 온천. 온천? 거기가 왜? 기묘한 그 색채. 다른 나라 같던. - 그리고 암전.

 

"니 이름을 내가 어떻게 아냐고? 그런데 아스나(あすな), 어차피 이거 네 진짜 이름도 아니잖아."

"네 이름은 뭔데."

"설마 이거까지 잊어버린 거야? 내 이름은 미호(ミホ)야."

 

난생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머릿속이 가물가물했어. 근데 내가 알고 있다고, 네 이름을 어떻게 잊어버리겠느냐고 말하길 기대하는 그 애의 눈빛을 보고 나는 대충 맞장구를 쳤지. 아, 그래, 미호! 미호, 알지. 그...

 

"내가 입었던 기모노 색."

"기모노...? 음, 파란색."

"됐어, 아스나(あすな) 너한텐 기대도 안 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솔직히 난데없이 나타나서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게 만든 게 누군데. 제멋대로인 그 애한테 심술이 나 입이 튀어나왔어. 꼭 말 지지리도 안 듣는 우리 오빠 같더라고. 그리고 우리 언제 처음 봤다고 다짜고짜 반말하고. 물론 나도 반말하기는 했고, 쟤도 내 또래인 것 같긴 하지만.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야. 집은 가고 싶은데, 아무래도 저 애는 날 데리고 아주 먼 곳으로 갈 것만 같더라고. 어느새 우리 집 근처를 지나서 고등학교도 보이지 않고, 친구들과 놀던 상가 골목들도 보이지 않았어. 간간이 있던 정원, 호수도 지나쳐서. 이제는 아주 알 수 없는 곳으로 갈 속셈인가보다 싶었지. 선선했던 바람은 조금씩 거세게 불고 있었고. 내 머리카락들은 바람 때문에 거세게 제멋대로 놀았고 가끔씩 짧은 가닥들이 눈을 건드려 찔끔거렸어. 근데 그 판국에서 더불어 그 애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자꾸 내 어깨에 닿았고, 목을 간지럽히고, 귀찮은 거야. 문득 거슬리는 감각을 참을 수 없어서 그 애한테 머리라도 묶으라고 주의를 주려고 옆을 바라보았는데, 나는 주의를 주기는 커녕, 머리카락이 휘날려 간간이 보이는, 눈을 부릅뜨고 인상을 찌푸린 그 애 얼굴에 꼼짝 못했어. 달아오른 귀는 도통 주체를 할 수 없더라. 파란 하늘에 내 귀만 유독 빨갛게 타오른 것만 같았어.

 

"아스나(あすな) 너 아파?"

"내가 뭘 했다고."

"니 귀가 정상이 아닌데?"

"정상 맞아! 그나저나 니 이름이 뭐랬더라... 미... 미호(ミホ)! 그래, 미호(ミホ)! 너 말이야, 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유바바의 분신들이 널 찾아낸 이상 다시 이야기를 짜 맞추러 가야지. 근데, 근데 말이야. 이제는 네가 기억을 잃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무슨 소리야?"

"너 거기 가서도 나 찾아낼 수 있겠어? 내가 도망치려고 할 때 그렇게 연기할 때, 유바바가 새의 형체를 한 채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날 찾아다닐 때 네가 숨겨줄 수 있겠어? 니가... 할 수 있냐고."

 

그 애는 급하게 말을 뱉어내면서도 발음 하나 뭉개지지 않았어. 내 손을 꼭 붙잡고 네가 과연 할 수 있겠냐, 너는 다 잊어버렸을 텐데 과연 기억을 하겠냐 등등 내가 알 수 없는 소리들만 지껄였어. 나보고 '할 수 있냐고...' 라고 말한 뒤에는 아주 고개를 푹 숙여버리더라.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이야. 그런데 그게 당연하지, 나는 얼마전만 해도 모갸쿠(ぼうきゃく)고등학교에 다니던 3학년, 이제 막 개학한지 2개월 된, 이름은 …… 아스나(あすな). 어쩌다 보니 아스나(あすな)가 되어버렸네.

 

 

 

*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줄게."

"잘 들어, 너. 아마 넌 모조리 다 잊어버릴 거야. 그러니까 넌 나보다 더 바보가 될 거라고. 니가 해야할 건, 유바바의 밑에서 우리 둘 다 빠져나오는 거야. 왜, 너 그때 실패했잖아."

"뭔 개소리야, 일단 유바바가 누군데?"

"온천의 주인 마녀. 너 딱 봐도 알 수 있을 거야, 그 할머니. 넌 그 사람의 부하고, 그리고 그 사람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해. 계약을 했거든. 네가 마법을 얻고 싶다고 그랬었어. 그리고 네 형체는 범이었고, 표범이었나 호랑이었나 잘 기억은 안 나. 여튼 고양잇과였지. 네 원래 이름은 …… 나 역시도 잘 모르고. 네가 그때 나를 등에 엎고 오면서 말해주긴 했지만... 나 역시도 가물가물해."

"무슨 네가 보던 영화 스토리 중간에 끊기기라도 한 거야? 나한테 왜 이래?"

"여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는 이름을 뺏겼어, 그 마녀한테. 그리고 너는 진짜 어리석게도 나를 두고 니가 대신 유바바 그 인간한테 죽었고. 너 맹세했잖아, 나를 구한다면 너도 죽을 수 있다고. 이 바보멍청이뇌에나사하나는빠진놈아!"

"진짜 혼자 흥분하고 혼자 욕하고 난리났네."

"너 또 이 지랄 반복할래?"

"누가 그걸 기억하기나 한데? 좀 알아먹게 얘기를 해보던가!"

"너 진짜 너무한 거 알아, 아스나(あすな)?"

"그러면 너 진짜 너무한 거 알아, 미호(ミホ)? 너도 알듯이 난 아무것도 기억 못해. 그래 니가 한 말 대로 난 바보멍청이뇌에나사하나는 빠진 놈이고, 그리고 난 네가 무슨 잡탕에밥말아먹는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니 말대로 해. 난 온천의 주인의 하인이고, 너를 찾아야 해. 그 이유가 뭐야? 넌 내가 왜 죽는다고 하는 거야? 너를 만나기 전, 그리고 그 복면 쓴 놈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어. 모자가게 집 딸래미. 그냥 잘 살고 있었다고. 너 갑자기 왜 내 삶에 나타나서 네가 이랬다, 저랬다 멋대로 이야기하고, 그게 현실인냥 말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건데? 이럴 거면 집에 보내줘!"

 

쟤가 나를 한 대 쳐도 좋았어. 난 너무 답답했고 쟤한테 뺨싸대기를 맞든 시원하게 욕을 먹든 뭐라도 어떻게 속 시원하게 알고 싶었어. 도대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단 말이야. 그 애는 너무나도 이상하고, 나도 이상하고. 우리는 하늘을 날고 있고. 이렇게 싸우는 와중에도 우리는 하늘 위에 우뚝 서 있고. 말도 안되는, 전부 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잖아.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괴상망측하고 꿈에 나와도 안 믿을 법한 그런 이야기잖아. 아니 지금 걔가 내 뺨을 때리면 나 엄마의 등짝을 맞고 침대에서 일어날지도 몰라. 그래서 그래서 묻고 싶었는데. 네가 말도 안되는 개소리만 해대길래 묻고 싶었는데. 너는 정말 영화속에서 나온 애처럼 마냥, 이 이야기가 전부다 현실이라는 걸 보증하는 듯 마냥.

 

울고 있잖아.

 

 

 

*

 

 

 

"너 진짜 너무한다, 너… 너 진짜 나쁜 새끼야. 그러니까 천벌 받을 그럴 새끼라고. 도와준다고 했잖아, 같이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잖아. 그리고 너 지금 나한테 이 말을 몇 번째 한 줄 알아?"

 

넌 나한테 이거 들으면 무릎 꿇고 빌어야 할 거다. 난, 난 지금 너 찾으러 열 번째 다시 시간을 되돌아왔어. 지금 네가 이러는 모습을 열 번은 더 봤다고. 무려, 아홉번은!!! 니가 똑같이 이렇게 굴다가 뒤졌어. 또다시 그 문 앞에서, 내가 모든 여정을 마무리 하는 그 앞에서! 네가 손 흔들어줬다고. 유바바 제자를 그만둘 거라며, 관둘거라며. 니가 니 입으로 똑똑히 말했잖아, 다음 세계에서 만날 수 있다고. 나는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어. 근데 어느날 잠을 들었는데, 그 세계로 가버린 거야. 눈을 떠 보니까 니가 또 내 앞에 있고 우리는 다리에서 만나고. 넌 니가 진정시키겠다며 나한테 도망치라 하고. 그 전에는 어땠는지 말해줄까? 악몽일까 싶었어, 자각몽일까 했어. 언젠간 끝이 나겠지 싶었지. 그런데 차를 타고 가는데 자꾸 아무리 가고 가도, 똑같은 성이야. 그 성의 입구에 도착해. 엄마, 아빠는 들어가고. 나는 말려도. 또 말도 안 되게 이야기가 시작해. 이제 조금 이해돼?

 

그 애는 아주 주저앉아 울었어. 다가가서 안아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나는 그 애를 지켜야만 했고 그 애랑 같이 살아나가야만 했고.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나는, 또다시 그애의 11번째 헛짓거리 놀음을 할 수 없도록 막아야만 했어.

 

 

 

 

 

*

 

 

 

눈을 감고, 숨을 세 번 크게 들이마셔. 이젠 우리 아주 땅으로 솟구칠 거야. 너무 빨리 추락하는 느낌에 온 몸이 진공청소기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나도 너는 절대 주저하지마. 발버둥치지마. 우린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거야. 말도 안되는 세계에, 그리고 다시 빠져나올 거야. 그니까 겁먹지마.

 

그 애는 그렇게 얘기했었다. 이제 다시 돌아가자고. 자기는 너무 지긋지긋하다고. 분명, 우리는 돌아갈 수 있어. 그 애는 내 두 손을 잡고 이야기했어. 아주, 아주 슬픈 얼굴으로. 아주, 아주 옅은 희망이 벤 얼굴으로.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물으면 그 애는 내 두 손을 꽉 쥐며 당연히 그럴 거라고 말했어. 너 아마 이 말을 나에게 아홉 번이나 했겠지? 그때마다 나는 아리송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을 거고. - 지금과 같이. 서울에서 봤던 63빌딩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우리는 두 손을 마주잡았어. 우리 사이로 원이 그려졌고 그것은 마치 마법진 같았지. 눈을 감고, 숨을 세 번 크게 들이마신 다음에 ……… 추락.

 

'돌아보지 말고.' 그딴 거지 같은 말만 하지마, 아스나(あすな).

 

네가 마지막으로 내게 해준 말을, 기억하지 못할 것을 뻔히 알고서.

 

 

 

* * *

 

 

 

"가자, 아스카(あすか)."

"난 더이상은 못 가. 그니까 넌 이대로 온 길로만 가면 돼. 터널을 나갈 때까지."

"아스카(あすか)는 어쩔 거야?"

"난 유바바의 제자를 관둘 거야. 진짜 이름도 되찾았으니까 나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거야."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어?"

"당연하지."

"꼭이야, 꼭 만나."

"미호(ミホ), 뒤는 보지 말고 얼른 가봐."

 

평생 잡혀있을 것만 같던 손이 놓였다. 실타래 같은 운명의 순간이 그렇게 끊기는 순간이었다. 손가락 마디 사이 시린 감촉이 나 바라본 손에는 상처가 나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가는 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네 머리에 예쁘게 난 꽁지는 유독 신이 나 흔들거리며 기쁜 티를 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영영 돌아가지 못할텐데, 영영. 나는 이게 마지막일텐데. 아쉬움이, 우울함이 차올라서 네게 다가가 붙잡고 싶었다. 아니, 그냥 네가 돌아봐주기를 기대했다. 한 번만 등 좀 돌려줘. 한 번만 나를 봐줘. 네가, 네가,

 

'돌아보지 말고.' 그딴 거지 같은 말만 하지마, 아스나(あすな).

 

그렇게 말했었잖아.

 

마지막 인사도 해주지 않을 네 뒷모습을 보내며 그렇게 10번째 마지막을 완성했다. 또 다시 너는 태연하게 이 세계에 다시 돌아올 것을 알지만, 또 다시 나는 너를 이렇게 떠나보내야 할 것을 알지만, 저 세계 너머의 네가 또 나의 손을 잡고, 어느날 내 손을 잡고 이 세계로 데려오게 될 테지만. 결국 이 세계에 넘어올 때 잊어버리는 건 너일 테지만. 원망 한 번 해본 적 없는걸, 이런 관계에.

 

저기 문 앞에 또 다시 네가 멈춰섰다. 잠깐 고민하다 다시 문으로 걸어갈 게 빤하다. 나는 오늘도 너와의 10번째 작별을 맞이하고 다시 유바바의 손으로 ……… 희진아, 그러니까 많이 불러보고 싶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걸. 희진아, 희진아, 희진아. 생생한 기억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제멋대로 잘 쌓아둔 감정의 벽을 부쉈다. 미호(ミホ), 전희진. 2년 전에 일본에 전학왔던 그 애, 그 때 철없고 멋 모르던 어린 애들 속에서 괴롭힘 당하고 있었던 내 손 잡아줬었던 그 애. 넌 왜 그 고양이 나타날 때만 내가 사라지냐고, 나한테 꼭 보여주고 싶다던 분홍색 고양이가 있다고 말했었잖아.

 

 

 

*

 

 

 

"나는 전희진이야. 일본 고양이는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들으려나? 그럼… ももいろのねこ(모모이로노네코, 분홍색 고양이)! 나는 사토우 미호(さとう ミホ)야. 나, 어쩌다가 또 전학가게 됐어. 여기 온지 며칠 됐다고. 대신 나 다시 여기 올게, 꼭 기다려줘! 내가 꼭 찾으러 갈 거니까!"

 

이름, 이름 정해줄까?

흠, 뭐가 예쁠까, 우리 고양이한테…

 

그래, 아스카(あすか)! 아스카(あすか)가 좋겠다!

예뻐라, 아스카(あすか)~

 

 

 

"미호(ミホ), 이러다 늦겠다! 아버지가 기다리셔!"

"아우 참, 아빠 아니랬죠? 아저씨라 했죠?"

"네 아버지 될 사람한테 좀 잘해줄 수 없니? 그리고 언제까지 그딴 고양이한테 시간 쓰고 있을거니? よしはまえき(요시하마)역으로 가는 열차 출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

"알겠어요, 알겠어. 나 갈게, 아스카(あすか) 잘 있어. 네가 꼭 다시 찾으러 올게."

"ぐるるるる・・・(그르릉・・・)"

 

"근데 엄마 나 어디로 가? 어느 고등학교 가냐구!"

"그게 그렇게 궁금해? 모갸쿠(ぼうきゃく)고등학교야, 아이치 현에 있는."

"거기서도 잘 지낼 수 있겠지?" 근데 이름도 영 별로다, 고등학교 이름이 망각이 뭐야? 망각이?

 

 

 

*

 

 

 

 

"아스카(あすか)-! 혹시나 해서 말이야. 네가 뒤돌아 보지 말라 했지만, 나 너무 간절해서 그런데, 혹시 같이 가면 안될까! 네 말 안 들었다고 욕해도 좋아, 그런데 나, 지금 너 놓치면... 다시 못 볼 것 같단 말이야…."

 

결국 네 세계로 다시 넘어가버렸어야 할 네가

등을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고

눈이 마주쳤을 때

금기를 깨버렸을 때

 

동시에 세상의 모든 균열이 깨져버렸다.

 

 

 

"현진아!"

작품의 저작권은 창작자 개인에게 있습니다.

A copyright of the work resides in the individual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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