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델타
마루 밑 아리에티
진솔(쇼우) X 김립(아리에티)
“오 진솔아 잘지냈제? 많이 컸네.”
진솔은 삼촌의 말에 대충 짧게 대답하고는 차에 짐을 싣고 뒷자석에 탔다. 오랜만에 만난 삼촌은 여전히 건강한 사람이었다. 매일 운동을 나가고 직접 밭일을 하는 만큼 삼촌의 몸은 근육으로 다져진 몸이었고 몸만큼 정신 또한 건강한 사람이었다. 진솔은 자신과 달리 그런 삼촌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아이고 저번에 봤을 때만 해도 요만했는데 언제 이렇게 컸냐 학교는 잘 다니고 있제? 머리는 언제 노랗게 했노 삼촌은 요즘 밭일 때문에 정신이 없다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삼촌은 진솔이 단답으로 대답할 수 있을 만한 질문 한두개만 던지고 자신의 이야기로 이어나갔다. 진솔은 대답을 해줘야 하나하고 생각했지만 생각만 했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삼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싶었을 뿐 그닥 대답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곧 진솔의 생각과는 다르게 삼촌은 말을 마치고 운전만 했다. 조용해진 차 안에서 진솔은 차창 밖을 보았다. 맑고 깨끗한 날이었다. 햇빛이 어느 정도밖에 안 들었지만 진솔은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고 느꼈다. 그만큼 진솔에게만은 너무 강하게 느껴졌다. 지금 날씨 그대로 햇빛 대신에 비만 왔으면 좋겠다. 진솔은 비가 올때면 항상 날씨가 흐려지는게 싫었다. 맑고 피크닉 갈 날씨 그대로에 비만 더하면 안 되나 했지만 안되었다. 자연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있었으면 이렇게 살지도 않았겠지만. 이딴 의미 없는 생각을 할 동안 삼촌의 집에 도착했다. 마당정원과 밭이 있고 숲과 연결되어 있는 이층 주택이었다. 주택이라도 일반 주택이 아니라 정말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이었다. 진솔의 집도 그랬기 때문에 큰 감흥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연친화적인 느낌이어서 힐링이라는걸 할 수 있을 만한 곳이겠다 정도는 생각했다. 삼촌이 진솔의 짐을 들어주면서 먼저 방에 짐을 둘 테니 정원 구경을 하고 있으라고 했다. ‘아 그냥 방에서 쉬고 싶은데’ 진솔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원으로 움직였다. 정원에는 검정색 고양이 한 마리가 돌아다녔다. 몸 전체가 털 하나 빠짐없이 쌔까만 고양이었다. 진솔은 말없이 고양이 주변에 앉았다. 고양이와 진솔은 서로 관심이 없었다. 고양이는 계속 민들레만 쳐다보고 있었고 진솔은 숲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멍때리고 있을때 갑자기 고양이가 야옹 소리를 내며 민들레 쪽으로 달려들었다. 자연스레 그쪽으로 눈길이 갔고 진솔은 얼핏 무엇을 보았다. ...? 엄지손가락 만한 크기로 뭔 사람같이 생긴 걸 보았다. 아니 본 것 같았나? 얼핏 금발 같아 보였는데 둘 다 노란색이어서 잘 모르겠다. 허 정진솔 이젠 별걸 다 보네. 진솔은 그냥 고양이 등을 한번 쓰다듬어주고 2층인 자신의 방에 올라갔다. 방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저 냥이 몸에 내 머리카락 빠지면 되게 잘 보이겠다 이런 생각이나 했다.
정은은 꽃잎을 모으는 게 취미다. 매일 점심때쯤에 항상 꽃잎을 주우러 다녔다. 집에서 나와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까지 귀뚜라미 애들이랑 달리기 시합을 한다. 바깥에는 매일매일 나와도 새로운 풀들이 너무 많다. 한번 하면 끝까지 하는 성격인 정은은 모든 풀은 안 되겠지만 꽃잎들 정도는 다 모으고 싶었다. 풀이 다섯 개면 꽃은 하나의 꼴로밖에 없으니까 그나마 덜 어렵겠지라는 마음이었다. 정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못 하는 것을 잘 구분했다. 목표를 정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는 것 같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 안에서는 끝까지 하는 성격이었다.
오늘은 민들레 꽃잎을 가져가기로 계획한 날이었다. 노란색 꽃잎을 모을 때가 나름 안전하다. 보호색처럼 자신의 머리도 노란색이어서 인간을 포함한 다른 생물들에게 들킬 걱정이 줄어든다. 그렇게 정은은 평소 하던 대로 꽃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잎까지 다가가 잎 하나를 뜯었다. 가늘고 길쭉한 모양이 방패 같았다. 방패라고 하기엔 너무 얇았지만 빳빳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딴 꽃을 구경하고 있는데 뒤에서 까만 고양이가 또 뛰어왔다. 쟤는 지치지도 않나... 정은은 달리기가 빨랐다. 꽃잎을 왼쪽팔에 끼고 집으로 가는 구멍으로 숨어들었다. 그 구멍은 고양이가 손도 못 넣을 만큼 작았다. “친구야 다음엔 크기 줄여서 와~” 고양이가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은은 매번 도망가고 한 마디씩 해 주었다. 집에 들어온 정은은 민들레를 방 문에 걸어 두었다. 음 예쁘군. 혼자 감탄하면서 만족했다. 정은의 방은 침대와 책상, 책꽂이같이 일반적인 가구들은 평범했지만 정은이 가져온 튤립, 장미, 벚꽃, 물망초, 수선화 그리고 오늘의 민들레가 그 방을 더 복작복작하게 만들어 주었다. 정은은 혼자 있는걸 싫어한다.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사용했던 꽃잎들은 이제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 되었다. 꽃잎들의 향이 섞여 방에는 좀 독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환기하면 그만이다. 방에서 민들레를 구경 하고 있을때 정은의 언니가 돌아왔다.
“언니 나갔다 왔어? 방에 있는 줄 알았어.”
“너 꽃잎 따러 갔을 때 잠깐 갔다 왔어. 이번에 새로운 인간이 왔어.”
“뭐?? 어떤 인간이야? 위험한 거 아니야?”
“잘 모르겠는데 좀 무기력해 보였어. 막 활발하진 않았고. 일단 지켜보자. 내가 항상 하는 말이 뭐야.”
“위험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맞아. 꼭 기억해둬 정은아.”
“그래도 오늘 밤에 갈 꺼지?”
“가야지. 지금 당장 각설탕이랑 소금이 급해.”
“알겠어 준비할게.”
정은은 언니와 둘이 살았다.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집안일을 했고 정은은 언니의 말을 절대적으로 들었다. 살면서 언니한테 반항할 만한 일도 거의 없었지만 정은에게 남은 사람은 언니밖에 없었다. 언니도 멋진 사람이였기에 정은이 믿고 따랐다. 둘은 서로밖에 없는 자매였다.
밤이 되자 정은은 나갈 준비를 했다. 검정 바지에 검정 자켓을 입었다. 정은이 나갈 때마다 입는 옷이다. 머리랑 대비되기는 하지만 밤에 가장 최적화된 옷이다. 쓸모없지만 오른쪽 팔에는 십자가도 그려져 있었다. 제발 오늘도 별일 없이 돌아오게 해주세요. 신이라는 존재에게 매번 기도는 한다. 신이 들어줬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지만 우리는 정말 별일 없이 돌아왔었다.
“립아 준비 다했어?”
우리는 인간의 물건을 빌릴 때 우리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또 다른 이름을 쓴다. 내 이름은 김립으로 독특한 게 하고 싶어서 내가 정했다. 근데 나가서는 이름 부를 일이 거의 없어서 잘 불리지 않는다. 언니의 물음에 짧게 대답하고 장비를 갖췄다. 높은 곳에서 내려갈 때 쓰는 갈고리와 노끈, 다시 높은 곳을 올라갈 때 필요한 양면테이프, 공격용 옷핀, 그 외에 자질구리한 것들이 없으면 나갈 수 없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인간의 집으로 이동한다. 그 과정도 꽤 위험하다. 지하로부터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 몸의 배가 되는 크기의 야생쥐들도 있고 인간들처럼 도로를 닦아 놓은 게 아니라서 울퉁불퉁한 돌들을 밟고 땅과 땅 사이가 벌어진 곳은 뛰어서 넘어야 된다. 떨어질 일은 한번도 없었고 잘 없지만 만약 떨어진다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느낀 높이다. 정은은 높은 곳을 무서워했다. 그러나 살기 위해 반복된 학습은 정은의 두려움을 덮었다. 아무리 무서워도 살아야 했다. 여전히 높은 곳은 싫지만 이젠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름 험난하게 인간의 집에 도착하면 주방으로 간다. 소금은 가스레인지 쪽에 있고 각설탕을 두는 곳은 찻잔 쪽이다. 이렇게 필요한 게 두 개인 날은 언니와 정은이 각각 담당해서 가져온다. 언니는 소금을 정은은 설탕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날은 각설탕을 담은 통이 찻잔 주변에 없었다. 진솔이 자신의 방에 가져가고 찻잔에 두지 않은 것이다.
“언니 설탕 여기 없는데 다른 방 갔다 올게.”
“내가 갈까?”
“아니 그냥 내가 갔다 올게.”
“조심히 다녀와. 위험은 알지?”
“알아.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고. 다녀올게.”
언니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정은을 보냈다. 사실 정은도 좀 무서웠지만 매일 하는 일이라서 아무 생각 없이 다른 방으로 향했다. 딱 마침 도착한 방이 진솔의 방이었고 각설탕은 진솔의 침대 쪽에 있었다. ‘오 바로 찾고 좋네‘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구멍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벽을 타고 식탁 다리를 따라 올라가서 겨우겨우 도착했다.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각설탕 하나를 가방에 챙기고 허리를 펴 기지개를 켜는 순간 백금발의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 정은은 발끝부터 피가 식는 기분이었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 한마디는 물론 사고 자체가 멈추어 버렸다. 몸은 움질일 수 없었고 단지 한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좆됐다.‘
어떡하지 도망가도 인간보다 느린데 아니 나 지금 도망가야 되는 건가? 쟤는 날 지금 제대로 본 건가 잠결에 눈 뜬 건 아닐까 아니 맞으면 어떡하지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정은이 패닉을 겪는 와중에 진솔은 정은을 정확히 보았다.
“헐”
결국 진솔은 감탄사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고 정은은 좆됐다고 확신했다. 진솔이 낮에 자신이 본 엄지손가락 만한 건 진짜 있었던 거였다. 걍 이제 별걸 다 본다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다. 저건 뭐지 생물인가 너무 인간같이 생겼는데. 진솔이 가만히 쳐다보면서 생각 할 동안 정은은 좆된걸 확신했을 때 정신이 들었다. 도망쳐야 된다. 날 보고도 바로 잡으러 안 온 거면 도망가도 아직 살 확률이 있을꺼야. 정은은 냅다 뛰었다. 그냥 앞뒤 가리지 않고 뛰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정은이 도망가는 걸 본 진솔은 또 한번 감탄사를 뱉었다.
“미친”
헐 움직이잖아 이거 실화냐. 진솔은 도망가는 정은을 쳐다보기만 하고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진솔은 그런 인간이다. 고양이도 그렇고 정은에게도 그렇고 보기만 할 뿐 다가가지 않는다. 저건 대체 뭘까. 정은은 그런 생각을 하는 진솔을 두고 언니에게 합류해 집으로 급히 돌아갔다. 정은은 대충 짐을 풀고 일찍 침대에 누웠다. 어떡하지 나 확실이 들켰어 나보고 미친이래 그래 나같이 생긴 걸 첨 봤는데 얼마나 놀랬겠어 나 잡으러 오면 어떡하지 언니한테 말해야 하나? 우리 이사가야되는건가 아진짜 어떡해야 되지 정은은 울면서 잠들었다.
진솔은 8시만 되면 항상 깬다. 아프고 난 뒤엔 아침에 잘 일어나게 되었다. 아프기 전엔 깨우지 않으면 2시, 3시까지 잤다. 아침에 자동으로 눈이 떠질때마다 진손을 자신이 아픈걸 확실히 느꼈다. 이렇게 잠 많은 내가 잘도 일어나네. 진솔은 다음주에 심장 수술을 받는다. 그동안 잠시 맑은 공기 쐬라고 이 시골까지 온 것이다. 딱히 진솔은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수술이 잘 될 것 같지도 않고 살더라고 살 의욕도 없다. 하고싶은 것 하나 없고 만나고 싶은 소중한 인간 하나 없다. 사는게 너무 귀찮고 벅차다. 걍 빨리 죽여줘~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사람 살리는게 더 낭비아닌가. 그래도 뭐 어쩌겠나 싶다. 일단 수술은 받는데 기대는 별로 안한다. 진솔은 이 한적하고 아름다운 시골까지 왔어도 밥 먹을 때 빼고는 계속 방에 있었다. 4일 내도록 방에 있는 진솔을 보고 정은은 언니가 한 말을 이해했다. 정말 무기력한 인간이네 크게 걱정안해도 될 것 같아. 다른 인간들의 말을 듣기론 저 인간이 심장이 아파서 수술을 한다는 거랑 오래 못 살꺼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주 그러니까 3일 뒤에 수술이 있다는 것. 그럼 3일만 같이 있고 이제 안 오는 건가 걱정할 필요 없네. 잡힐 걱정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괜한 오지랖이 생긴다. 수술 잘못되면 죽는건가? 그건 좀... 그렇잖아. 그래도 그것과 별개로 인간에게 다가가면 안된다. 인간은 위험하기 때문에 순식간에 죽을 수도 있다. 정은은 그런 것들을 뒤로하고 매일 모으는 꽃잎을 따러 나갔다. 그날은 흐렸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는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약한 비여서 정은은 양배추꽃을 따러 갔다.
진솔은 비오는게 좋았다. 자신이 집 안에 있는게 당연하고 합리화 되기 때문이다. 그냥 나가기 싫은걸 내가 오래 못살아서 병약한 비운의 인간으로 만드는게 싫었다. 아프기 전에도 크게 다를 바 없었을 만큼 진솔은 인생에 큰 재미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이것 저것 뒤로하고 비오는 날이 좋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떠내려가고 빗줄기가 덮어줘서 좋았다. 정은이 양배추꽃잎을 따러 가는 날 진솔은 오랜만에 보는 비를 구경하러 정원에 나갔다. 파란 우산을 쓰고 첫 날 조그만 인간을 보러 간 곳으로 걸어갔다. 양배추꽃은 민들레 좀 떨어진 곳에 있었고 정은은 양배추꽃으로 가는 길에 파란 우산을 쓴 아픈 인간을 보았다. 이 아픈 인간은 자신을 잡지 않을 것이라는 무언의 확신이 있어서 정은은 몰래몰래 마저 지나갔다. 진솔은 가만히 서서 민들레만 보고 있었는데 땅에 조그만 인간이 지나간 것을 보았다. 말 걸어도 되나 이해하려나.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진솔은 말부터 먼저 나갔다.
“안녕.”
정은은 가던 길을 멈추고 파란 우산을 쓴 인간을 보았다.
“어디 가는 거야?”
말이 느릿느릿한 인간이었다. 답 해줘야하나 그래 뭐 해주면 어때 안 해줬다가 잡아먹힐 수도 있잖아. 오지랖의 합리화였다.
“양배추꽃잎 따러.”
아 말할 수 있구나. 진솔은 좀 놀랬다.
“왜 따는 거야?”
“그냥 방 꾸미려고.”
“방이 있어?”
“우리도 너희랑 똑같이 살아.”
“그게 어떤건데?”
“거실 있고 주방 있고 방도 있어. 먹고 입고 살고 다 너희랑 같아.”
“그렇구나.”
뭐야 저게 단가. 정은은 더 이상의 질문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
“......”
“......”
“... 더 질문 없어? 내가 안 신기해?”
“더 물어봐도 돼?”
“물어봐...”
그때부터 인간의 질문은 시작되었다. 어디 살아? 그건 말 안해 우리가 위험해져. 그렇구나. 뭐 먹고 살아? 빵이나 쌀알 같은 거. 가족은 있어? 언니 있어. 그렇구나. 옷은 어떻게 만들어? 언니가 손재주가 좋아서 직접 만들어줘. 너희 말고 작은 사람들 더 있어? 있어 곳곳에 있는데 인간들이 찾기 어려우니까 찾으려고 하지마. 그렇구나.
“너는 이름이 뭐야?”
“......김립.”
“그렇구나. 독특하네.”
“그럼 너는 이름이 뭐야?”
“나 진솔이야, 정신솔.”
“진솔? 그럼 너는 네 이름 같은 사람이야?”
“하하 그런 걸 묻네.”
“...”
“아니 난 애초에 그렇지도 못하고 그럴 마음도 없어. 나 오래 못 살 거 같거든.”
아 심장 이야긴가. 정은은 생각했다.
“나 심장 3일 뒤에 심장 수술받아. 갑자기 아파서 병원 갔더니 오래 못 산대. 수술해야 된다는데 딱히 수술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살 마음도 없어.”
“왜 살기 싫은데?”
“그냥 살 가치도 모르겠고 의미가 없어. 딱 죽지 못해 사는 거야.”
“그래도 계속 살아보면 찾을 수도 있잖아.”
“그거 하나 찾자고 계속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정은은 괜히 울컥했다. 왜 그렇게 말하지. 정은은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몰라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입을 닫고 서 있었다. 단지 진솔을 바라볼 뿐이였다.
“그럼 내가 너 수술 받는 날까지 매일 얘기해줄게. 네 방 2층이지? 내가 찾아갈게.”
“어? 올 수 있어? 가능해?”
“당연하지 매일 지나가는데.”
“와 친구 생겼네. 기대할게 매일 놀러 와야 돼.”
진솔은 정은을 보며 웃었다. 정은은 웃는 모습이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백금발 머리의 진솔은 까만 고양이와 반대되게 하얗고 상냥한 웃음이었다. 예쁘네. 진솔은 양배추꽃잎을 하나 따서 정은에게 주었다.
“립아 그럼 내일 꼭 내방에 와줘야 돼”
진솔은 정은이 집으로 가는 구멍까지 우산을 씌워주며 정은의 발걸음에 맞춰 느리게 걸어갔다.
“내일 봐”
진솔은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정은은 파란 우산을 쳐다보았다.
정은은 2일동안 매일 진솔에게 찾아갔고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진솔의 세계는 정은이 예상한 것 보다 훨씬 큰 세계였고 정은의 세계는 진솔에게 완전히 새로운 평행세계였다. 둘은 점심때부터 저녁까지 이야기했고 단 이틀 동안 그들은 그 속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정은은 이를 느꼈지만 뭔지 잘 몰랐고 진솔은 입을 닫았다.
수술 날이 왔다. 정은은 그 전날 밤에 잘 수 없었다. 진솔과 헤어진 뒤 하루종일 정진솔 생각만 했다. 결국 날이 밝자마자 진솔의 방에 찾아가 울었다. 펑펑 울었다. 진솔아 제발 안 죽으면 안돼? 제발 살아줘 나 다시 못 만나도 되니까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못될 수도 있는데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진솔아 진솔아 제발 살아서 나랑 이야기 더 하고 서로 얼굴 보면서 대화하고 싶어 네 목소리 듣고싶어 네가 네 목소리로 노래해 줬으면 좋겠어 진솔아 널 계속 보고 싶어. 정은은 진솔의 손바닥 안에서 진솔의 검지 손가락을 안고 애원하듯 울었다. 진솔에게 말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지만 정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진솔과 함께하고 싶었다. 진솔은 그런 정은이 우는 것을 바라보다 결국 눈물을 조금 흘렸다.
“립아 나 정말 살기 싫었어. 살 이유도 없었는데 네가 나 하나 때문에 우니까 너무 마음이 아파. 슬프기도 하고 너무 기뻐. 날 위해 눈물 흘려줘서 고마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 꼭 살아보고 싶어. 네 얼굴 하나 보려고.”
진솔은 손을 들어 정은에게 입을 맞췄다. 립아 고마워.
정은은 계속 울었다. 진솔의 말을 듣고는 목 놓아 울었다. 너도 나한테 그만큼 큰 의미를 가졌어. 어떻게 삼일 만에 이렇게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냥 너를 사랑해.
그날 오후 진솔은 병원으로 떠났고 정은은 떠나는 진솔을 바라보았다. 립이라는 이름을 그렇게 많이 불려본 적도 처음이었고 언니 말고 그 이름을 불러준 사람도 처음이었다. 내 평소 이름 알려주고 싶었는데. 진솔아 다시 돌아와서 내 이름 불러줘. 정은이야 내 이름. 꼭 다시 와서 불러줘 제발. 기다릴게 진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