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박채원(센) X 손혜주(하쿠)
1.
"고원아! 여기도 마저 닦아라."
"네, 금방 가겠습니다."
대조적인 두 목소리가 맞물려 이질적인 화음을 만들어냈다. 잠시 후 비어있던 탕에 물이 조금 차오르고, 그 옆으로 고원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양동이를, 다른 한 손에는 밀대걸레를 든 채 잠시 숨을 고르던 고원은 이내 탕으로 들어섰다. 온통 흰 깃털로 가득 찬, 백색의 늪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고개를 내저으며 양동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고원이 밀대를 밀자 걸레가 지난 자리로 깃털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모든 날 것들의 신, 이브의 깃털이었다. 이 탕을 자주 찾는 신 중 하나였지만 고원의 관심 밖이었다. 신들은 모두 제 이름이 아닌 것을 썼으니까. 진짜가 아닌 것에 고원의 관심은 없었다.
고원이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이곳에서, 오바바는 그녀에게 '고원'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예전 이름을 자신의 금고에 넣어버린 오바바가 고원에게 꺼낸 첫마디는 짧았다.
"가짜 녀석아, 가서 일이나 해."
그래서 고원은 탕에서 일을 했다. 이곳은 신들의 휴식처, 신들의 온천. 인간이면서 동시에 '가짜'인 고원의 자리는 항상 가장자리였다. 자신이 거뜬히 들어갈 목욕 바구니를 나르고, 인간의 것보다 10배는 큰 탕 안을 닦고, 그 곳에 새로 물을 받아 신들이 좋아하는 입욕제를 넣었다. 입욕제의 종류도 다양했다. 사과 과육이 가득한 것, 태양과 별의 가루를 섞은 것, 월식 때만 채취할 수 있는 모래로 만든 것. 대부분의 신들은 고원을 거들떠보지 않았기에 일은 힘들지 않았다. 이따금씩 '최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신 하나가 자꾸만 금을 내밀어 귀찮았을 뿐. 최리를 제외하면 고원에게 관심을 가지는 신은 단 하나 뿐이었다.
탕의 문이 열리고, 오바바의 안내를 받으며 누군가 들어섰다. 그 얼굴을 마주한 고원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고, 그 대상은 익숙하게 고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나쳤다. 늑대의 형상을 한, 고원에게 지나치다시피 관심을 주는 존재. 이름을 잃어버린 고원에게 '진짜' 이름을 알려준 이상한 존재.
모든 짐승들의 황제, '올리비아 혜'였다.
2.
고원이 올리비아 혜를 처음 만난 것은 탕에서 일하기 전, 고원이 처음 이 곳에 발을 들인 날이었다.
혼자서 떠난 배낭여행에서 우연히 대나무 숲길을 발견해 발을 들인 고원이 붉은 다리 위로 발을 올렸을 때, 그 위에 올리비아 혜가 서있었다. 늑대의 모습이 아닌, 검은 긴 생머리에 날카로운 눈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멍하니 다리 위에서 강가를 내려다보던 올리비아 혜의 시선이 고원에게로 돌아와 멈췄다. 잠시 눈을 껌뻑거리던 올리비아 혜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곧장 고원에게로 달려와 어깨를 붙잡았다.
"너 누구야? 여기에 제 발로 들어오다니, 제정신이야?"
화가 난 듯 한 올리비아 혜의 행동에 놀란 채원이 뒷걸음질 쳤지만 이상하게도 무엇인가에 막혀버렸다. 채원은 뒤를 돌아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지나온 대나무 숲은 온데간데없고 커다란 문이 제 등에 닿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채원이 놀라며 문을 밀어보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길."
올리비아 혜의 낮은 목소리가 불안하게 울려 퍼졌다.
2-1.
고원은 올리비아 혜에게 이곳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오바바라는 존재가 이곳을 관리하고 있으며, 이곳은 신들의 공간이라는 것. 자신은 신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하나를 꼭 명심하라고 했다.
"절대, 너의 '진짜' 이름을 잊어서는 안 돼."
"...왜?"
"진짜 이름이 너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는 순간, 너는 절대 이곳에서 나갈 수 없게 돼. 그러니까 조심해."
그리고는 손에 메모지 한 장을 쥐어줬다. 그 곳에는 '박채원'이라는 이름이 휘갈겨 적혀 있었다. 놀란 고원이 올리비아 혜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인다.
"너의 이름을 기억해. 나처럼 되지 말고."
3.
그 날부터 고원은 자나 깨나 그 메모를 읽으며 자신의 이름을 되새겼다. 채원, 박채원, 박채원. 올리비아 혜, 올리비아 혜. 저도 모르게 늑대의 이름을 외며 고원은 생각했다.
그 늑대의 이름은,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호기심이 생긴 고원은 올리비아 혜가 탕을 찾을 때마다 이름을 물었다. 진짜 이름은 무엇이냐고. 내 진짜 이름을 알려주었으니, 당신의 진짜 이름도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올리비아 혜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몰라. 알았으면, 벌써 이곳을 떠났을 거야."
시치미를 떼는 것 같지도 않았고,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고원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늑대는 제 이름을 알지 못했다.
4.
고원에게는 목표가 생겼다.
올리비아 혜의 진짜 이름을 알아내는 것.
늑대에게 진짜 이름을 알려주는 것.
그리고...
4-1.
가능하다면,
이 세계를 함께 빠져나가는 것.
5.
'오바바의 금고에, 모든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고원의 손이 바쁘게 떨려왔다. 잃을 것이 없었으니, 두려울 것도 없었다. 제니바가 알려준, 오바바가 절대 잠에서 깨지 않는 시간이었다. 고원의 손이 떨리다 멈췄다. 가마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너는, 고원이 아니라 채원이잖니.'
6.
고원은 금고를 열었다.
6-1.
수많은 이름들이 나비처럼 날아올랐고, 고원은 저도 모르게 이름 하나를 잡아챘다.
6-2.
손혜주.
7.
"손혜주."
올리비아 혜, 아니 혜주의 손이 떨렸다.
"혜주야, 너는."
"맞아... 손혜주, 이게 내 이름이야!"
혜주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크게 하울링을 했다. 온천물이 낮게 일렁였다. 꼭 파도처럼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던 물은 조금씩 낮아지더니 이내 잔잔해졌다. 하지만 혜주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고원의 머리에 코를 비벼댔다. 옅게 과일향이 났다. 꼭, 자두 같은.
"고마워. 내 이름을 찾아줘서."
"...아니야. 이름도 모르고 우는 늑대가 불쌍해서 찾아준 것뿐이니까."
"그래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잖아. 오바바의 사무실에 들어간 것부터..."
혜주의 몸에서 털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하얀 원피스를 입은 인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언제 봐도 참 또렷한 눈이었다. 늑대일 때보다 인간의 모습일 때 더 도드라지는, 저를 꿰뚫어보는 듯 한 그 눈을 고원은 좋아했다. 항상 확신과 신념으로 가득한 눈동자. 가짜들이 가득한 이 온천에서 유일하게 '진짜'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그 눈. 혜주는 고원을 안아왔다. 역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품이었다.
"고마워. 정말, 정말 고마워."
혜주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울고 있었다.
8.
"같이... 나가자고?"
"응. 너도 이름을 찾았으니까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잖아."
혜주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고원의 말투는 단호했다. 혜주는 잠시 고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깊은 한숨을 곁들인, 슬픈 표정을 한 채였다.
"안 돼.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해."
"왜?"
"...나는 너처럼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잘 들어."
8-1.
이곳에는 많은 신들이 있어.
모든 날 것들의 신, 이브.
밤의 신, 립
숲의 신, 비비...
그런데 이곳에 신들만 있는 건 아냐. 그 신들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지. 최리, 알지? 그 왜, 손에서 금 만드는 애. 그런 애처럼 요괴도 있고, 너처럼 발을 잘못 들여 이름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인간들, 비비의 숲을 맴도는 여러 짐승들... 이곳에는 다양한 '것'들이 살아. 그럼 그것들은 누가 관리를 할까? 오바바는 온천에 있는 것 의외에는 관심이 없어. 그렇기 때문에 그 외의 존재들은 주체적으로 리더라는 것을 만들어 냈어.
그 중에서도 나는 모든 짐승들의 황제. 600년 동안 그들을 이끌어 온 리더야.
8-2.
미안, 나는 나갈 수 없어.
9.
혜주는 다리의 건너편에 서있었다.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입술을 비틀어 끌어올린 얼굴이었다. 그 손에는 편지 하나를 꼭 쥐고 있었다. 채원은 그런 혜주를 돌아보며 옅게 웃어보였다. 떠나고 싶으나 떠날 수 없는 황제와, 떠나야만 하는 인간의 감정은 어떤 것일까.
"...가지마?"
채원의 목소리가 낮게 다리를 건넜다. 혜주에게 그 목소리가 닿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혜주의 표정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웃는 걸까, 우는 걸까. 잠시 입술이 파래질 정도로 꽉 깨물던 혜주의 목에서 잔뜩 막힌 목소리가 떠올랐다.
"얼른 가. 오바바는 모를 거야."
"나, 없어도 괜찮겠어?"
"...힘들겠지."
혜주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나서야, 혜주의 얼굴에 파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괜찮아. 그 고통으로 내가 너를 기억할 테니까."
"..."
"손혜주를 되찾아준 박채원으로, 난 너를 영원히 기억할거야."
혜주는 손을 펼쳐 편지를 채원에게 날려 보냈다. 채원은 마치 나비처럼 자신의 손에 내려앉은 그 편지를 펼쳤다. 잠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채원은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혜주를 바라봤다.
"손혜주, 인간의 명이 다할 때까지, 나 역시."
"...고마워. 얼른 가, 곧 문 닫히겠다."
혜주의 말과 함께 채원의 등 뒤로 문이 드러났다. 반 쯤 열린 문틈으로 채원이 처음 발을 들였던 숲의 모습이 보였다. 채원은 문고리를 잡았다.
"안녕, 나의 늑대."
채원이 사라지고, 혜주가 돌아섰다. 흐르던 눈물은 어느새 마른 채였다. 숲으로 들어서며 혜주는 잠시 채원이 사라진 다리를 한 번 돌아보고는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잘 가, 나의 인간."
10.
안녕, 인간. 아니, 고원. 아니, 박채원.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너에게는 지옥이었을까, 감옥이었을까. 내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리 행복한 기억은 아니었겠지. 인간으로써 신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뭐, 선택권이 없었으니 별 수 없었겠지만.
처음 너를 보았을 때, 뭐라고 해야 할까, 꼭 입욕제 없는 탕 같은 느낌이었어. 표현이 좀 그런가? 뭔가 텅 비어있는 맑은 물. 그게 너였어. 무엇인가 빠져있었지만 그래서 티 없이 순수한 어떤 것.
아마 내가 너에게 끌렸던 것은, 그래서였겠지.
처음에는 감정 없는 네가 궁금했어. 처음 만났을 때 빼고는, 온천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는 항상 무감했으니까. 왜 항상 무표정일까, 무슨 불만이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그 질문들의 꼬리에 도달했을 때는 이렇게 바뀌어 있었을 거야.
너는,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래서 너무 고마웠어. 네가 내 이름을 찾아주었으니까. 손혜주, 세 글자를 네 손으로 나에게 돌려주었으니까.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온 그 날 보았던 그 눈이 나의 진짜 모습에 비춰졌으니까.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지만, 너는 이곳에 있을 수 없어. 아쉬움보다는 그리움이 크겠지만 괜찮아. 이 편지는 너에게 나를 기억하게 만들 테니까. 나의 이름 세 글자가, 너를 기억하게 할 테니까.
손혜주, 내 진짜 이름 세 글자를 걸고 맹세할게.
박채원,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기억할게.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